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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공부/조선 (1392~1919)

[조선시대 역사] 19대 숙종/ 20대 경종/ 21대 영조 - 핵심 정리

by 궁그미~ 2022.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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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대 숙종(1674~1720, 45년 11개월) / 이순(~59세)


조선왕조를 통틀어 당파 간 정쟁이 가장 심했던 기간. 비상한 정치 능력으로 왕권 회복, 사회 안정시킴.-조선 사회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왕 / 중전과 후궁들 애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해 옥사를 유발하여 치세에 흠을 남김 (결과만을 놓고 보면 외척과 아내까지도 철저하게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한 것)
- 명성왕후 김씨의 외동아들. 7세에 왕세자 책봉, 14세 즉위하여 바로 친정 시작
- 부왕의 의견에 따라 남인의 기년설 지지, 송시열 유배/ 남인이 정권 주도, 명성왕후 사촌동생 김석주 기용(남인 견제)
경신환국(1680, 경신대출척, 홍수의 변): 김석주가 남인을 몰아내기 위해 짠 계략으로 남인 세력 축출 
기사환국(1689) : 서인(송시열 등 노론계 정치인들)이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세우는 것을 반대하자, 숙종이 중전 민씨를 폐위하고 희빈 장씨를 중전에 앉힘서인은 다시 남인에게 정권을 내줌.
갑술환국(1694) : 노론계에서 폐비 민씨 복위 운동 전개. 민씨 폐위를 후회하던 숙종이 남인을 오히려 축출해버림.
무고의 옥(1701) : 희빈 장씨가 민씨를 저주하기 위한 신당 발견. 무속 신앙에서 비롯된 옥. (세자를 위해 용서해줄 것을 간청한 소론 세력을 정치 일선에서 제거하고, 노론이 대거 조정에 진출)
=> 현종 때 예송으로 손상을 입은 왕실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환국을 감행(정치 국면의 전환을 꾀함)
- 임진왜란 이후 사회 체제 전반의 정비, 복구 작업이 거의 종료 / 대동법 전국 확대 실시(세입 일원화 계획 완성) / 조선 후기 상업 발달과 사회 경제적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침
- 1712년 청과 협상하여 영토의 경계선 확정. 일본에 통신사 파견해 막부 정권과 협상하여 울릉도 귀속 문제 해결
희빈 장씨(장옥정, 1659~1701)
- 장길산 : 숙종 대 산적 두목으로 유명했던 실존 인물(홍길동, 임꺽정과 더불어 조선 3대 도적), 끝내 잡히지 않은 유일한 의적으로 거대한 조직에서 활동했음.
오가작통법 강화 : 다섯가구를 하나의 통으로 묶는 마을 조직. 백성들의 호구 수를 정확하게 파악, 유민 방지, 부역과 조세 업무를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함. 관리나 아전들의 노골적인 착취 행위를 뒷받침 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백성들의 감시 조직으로 인식될수밖에 없었음.(19세기에 이르러 천주교, 동학교도를 색출하는 수단으로 이용)

 

숙종의 글씨

 

 

 

 



* 20대 경종(1720~1724, 4년 4개월) / 이윤(~36세)


- 희빈 장씨의 아들. 희빈 장씨를 죽음으로 몰고간 노론에 대한 정치적 박해를 예고한 경종의 등극.
- 14세에 어머니 희빈 장씨가 사사된 사건 이후 줄곧 병환에 시달리며 후사도 얻지 못함(희빈장씨가 사약을 받으면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고 싶다 애원해 세자가 오자 달려와서 그의 하초를 움켜쥐고 잡아당겨버림, 세자 기절)
- 숙종이 1717년 노론 좌의정 이이명에게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영조)을 후사로 정할 것을 부탁하면서부터, 세자 윤을 지지하는 소론과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간 당쟁이 격화됨
- 경종이 소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21년 연잉군을 세제에 책봉. 이후 대리청정 명을 하고 거둬들이기 반복하며 당쟁만 더욱 격화 / 이후 소론 정권으로 환국이 단행 (신임사화), 경종이 죽자 소론의 짧은 정권 독점기가 끝남

 

노론 의 영수인 이이명 의 초상화. 이이명은 신임사화  때 처형됨.

 

보물 제1491호 《 연잉군 초상 》 :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의 연잉군 시절의 초상화로, 21세때의 모습.

 

 

 



* 21대 영조(1724~1776, 51년 8개월-조선 왕 중 가장 오랫동안 왕위) / 이금(~82세)


-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의 아들. 전례로 보아 모역에 가담한 왕자가 살아남은 경우는 없었으나, 연잉군 외에는 왕통을 이을 왕자가 없었기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함. (소론측 대신들에 의해 갖은 고초)
탕평정국 : 인재를 고루 등용하려는 노력. 비상한 정치 능력으로 탕평정국 안정기. 재야에서 실사구시 학문으로 사회 전반에 새로운 바람.
사회 각 방면에서 부흥기 : 동색금혼패 집마다 걸게 함 / 삼복법으로 사형에 신중 / 신문고 제도 부활 / 균역법 시행(백성들의 군역 부담 감소) / 일본 통신사 조엄이 고구마 가져와 흉년에 도움 / 서얼 출신도 관리로 등용 / 실학 확대
- 정순왕후 김씨 : 정비 정성왕후가 죽자 15세 나이로 66세 영조와 가례 올림. 소생은 없고, 영빈 이씨 소생인 장헌세자(사도세자)를 미워해 모함하고 뒤주에 가둬 굶어죽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함.
장헌세자(사도세자, 장조) : 일종의 조울증에 시달림.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고, 분개한 영조가 자결하라 명했지만 거부하자, 그를 뒤주에 가워 8일만에 굶겨죽임.(28세)
혜빈홍씨 : 정조의 어머니. 남편인 사도세자의 참사를 중심으로 한 많은 일생을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을 남김.
- 이인좌의 난(무신난, 1728): 정권에서 배제된 소론 일부와 남인 과격 세력이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하려 했던 사건으로, 결과적으로 영조의 탕평정국의 기반을 다지게 하는 구실이 됨.
- 안정복: 역사서 편찬 방법에 일대 전환을 가져온 인물. (동사강목_상고시대~고려시대 역사서, 열조통기_철저히 객관적 시각으로 당시의 현대사를 기술) / 홍대용: 지전설, 우주 무한론 주장
- 서얼통청 운동 : 서얼도 문관, 대간, 청요직 등용이 허락되어야 한다는 서얼층의 집단 행동. 서얼차대 철폐론에 대한 최초의 공식적 수용  -> 정조대 더 큰 진전, 1894 갑오개혁에 이르러 차대가 거의 사라짐

 

보물 제932호  〈 영조 어진 〉

 

사도세자 초상화 (작자 미상의 무속화, 19세기 작)

 

청나라 시대 문인 엄성(嚴誠)이 그린 홍대용

 

 


 

참고서적 : <조선왕조실록> 박영규 지음

참고 사이트,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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